위대한 수령님을 일편단심 충직하게 받든 참된 혁명가


김책동지의 서거 60돐에 즈음하여

김책동지와 함께

사람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김책동지와 함께 찍으신 한상의 색바랜 사진을 잊지 못하고있다.

령도자와 전사사이에 흘러넘치는 숭고한 혁명적동지애의 화폭을 우러르느라면 어버이수령님의고귀한 유산인 그 사진을 보고 또 보시며 우리 장군님께서 절절하게 하신 말씀이 깊은 감회속에 되새겨진다.

《원래 수령님께서는 사진들을 다 당력사연구소에 보관하시였습니다. 그런데 수령님께서김책동지와 함께 찍으신 사진만은 직접 금고에 따로 보관하여두시였습니다.

이것은 수령님께서 전우인 김책동지를 얼마나 못 잊어 하시였는가 하는것을 잘 말하여줍니다.》

선군혁명의 앞길에 오늘도 투철한 신념과 순결한 량심으로 수령을 결사옹위한 충신원로로 별처럼 빛나는 김책동지!

그가 우리곁을 떠난 때로부터 어언 60년세월이 흘렀다.

당과 수령의 추억속에 영생하는 김책동지의 한생은 참된 혁명가란 어떤 사람이며 혁명가는 일생동안 어떻게 살며 투쟁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빛나는 인생행로였다.

오늘 우리는 혁명의 길에서 위대한 수령님께 다진 맹세대로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그이의 가장 충직한 혁명전사로 살며 일해온 김책동지의 하많은 투쟁이야기가운데서 그 일부를 펼친다.

영원히 변치 않을 심장의 맹세

《김책동무, 우리 서로의 심장과 심장을 얹고 동지적우정과 사랑을 확약한 오늘을 영원히 잊지 맙시다.》

어버이수령님의 이 말씀을 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일편단심 당과 수령께 무한히 충직한 김책동지,

그가 위대한 수령님을 처음으로 만나뵈온것은 주체29(1940)년 12월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김책동지가 밖으로 뛰여나오니 그이께서는 벌써 대원들과 함께 마당에 들어서고계시였다.

후리후리한 키, 준수한 얼굴, 온몸에서 넘쳐나는 젊음과 약동하는 기백…

(아, 저분이 일제를 때려부시고 조국을 찾으려는 민족의 지향과 숙원을 한몸에 지니신김일성장군님이시란 말인가.)

그는 눈부신 태양을 마중가듯 어버이수령님께로 막 달려갔다.

《장군님, 제 김책입니다.》

《김일성입니다.》

두팔을 벌리시고 김책동지의 앞으로 급히 걸어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와락 그러안으시였다.

가슴속에 차넘치던 그리움의 정을 한껏 쏟아부으시며 김책동지를 뜨겁게 포옹하시기를 그 몇번,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책동지의 손을 꼭 잡으시고 첫 대면인데 구면같다고,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마음속으로 서로 생각하고 그리워 했다는것을 의미한다고 정담아 말씀하시였다.

한없이 인자하고 소탈한 인품에 완전히 매혹된 김책동지는 《김사령을 만나는 길이 왜 이다지도 멀었는지.》

하고 혼자소리로 뇌이였다.

눈물이 글썽해진 그의 얼굴에서 옳바른 혁명의 길을 찾기 위해 온갖 풍파를 겪어온 고난의 흔적을 읽으신듯 그이께서는 길은 여러 갈래이지만 대문은 하나라고, 서로 그리며 마음속정을 나누던 우리가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되여 정말 반갑다고 다시금 말씀하시였다.

불보다 뜨거운 진정이 넘쳐흐르는 그이의 말씀을 받아안는 순간 김책동지의 눈앞에는 10년전 위대한수령님을 찾아 길림으로 떠났던 일이 어제런듯 떠올랐다.

녕안현의 어느 한 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던 김책동지는 어느날 한 제자로부터 온 만주땅을 들었다놓았던 길림육문중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 그리고 일본상품배척투쟁이야기를 들으며 투쟁의 조직자, 지도자가 10대의 젊으신분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나이는 많지 않지만 인망이 높고 친화력이 강하며 파벌로 망한 조선공산당산하도 아니고 종파와도 아무런 인연이 없는 조선혁명의 새로운 력량을 대표하시는 그분에 대한 생각으로 온 밤 잠들지 못한 김책동지는 곧 길림으로 떠날것을 결심하였다.

하지만 그는 길림땅을 휩쓸었던 《적색 5월》의 여파로 끝내 수령님을 만나뵙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그길로 북만쪽에 간 김책동지는 국민당군대에 붙잡혀 1년 남짓한 기간 길림, 심양, 할빈형무소들에 끌려다니며 감옥살이를 하였고 9. 18사변후 감옥문을 나서기 바쁘게 또다시 군벌경찰에 체포되여 사형선고를 받고 끌려나갔다가 반일사상이 강한 한 진보적인 장교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던것이다. …

이처럼 곡절많은 운명의 길을 걸으면서도 혁명의 길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김책동지를 만나신 수령님의 기쁨은 비길데 없이 크시였다. 이 뜻깊은 상봉을 위해 5년전 우리 수령님 헤치신 북만원정의 길은 얼마나 멀고 험난했던가.

살을 지지는것 같은 뙤약볕과 지독스레 달려드는 모기떼, 경사가 급하고 초목이 뒤엉킨 행군로…

오랜 세월 그처럼 강렬하게 불타던 그리움속에 이루어진 상봉의 기쁨을 마디마디에 담으시고 오늘에야 그날의 아쉬움이 풀리는것 같다고 하신 그이의 말씀은 김책동지의 가슴을 후덥게 달구어주었다.

날과 달을 이어가며 마음속에 간직하여온 위대한 수령님과 김책동지사이의 그리움의 세계는 이렇듯 뜨겁고 열렬하였다.

곡절많은 혁명의 길, 령도자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의 길을 걷고 또 걸으며 마침내 위대한 태양의 품에 안긴 김책동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가짐을 바로한 그는 근엄한 목소리로 위대한 수령님께 정중히 말씀드리였다.

《장군님! 저는 오래전부터 장군님을 조선혁명의 령도자로, 조선의 진짜장군으로 받들어왔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장군님휘하에서 싸우다가 장군님의 무릎을 베고 죽겠습니다. 장군님곁에만 있게 된다면 전 군직도 당직도 다 필요없습니다. 그러니 저를 이제부터 성위가 아니라 동무라고 불러주십시오.》

그의 말에 놀라운 표정을 지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책동지에게 옛날부터 10년지기는 형제간과 같다고 하였는데 성위동지는 나보다 나이도 9년이나 이상이고 또 혁명년조도 오래지 않는가고 말씀하시였다.

순간 그의 입에서는 이런 불같은 맹세가 쏟아져나왔다.

《예로부터 장군이 군졸을 거느린다고 하였습니다. 군졸한테 무슨 나이며 년조가 필요합니까. 저는 장군님의 령을 받드는 군졸이 되고 장군님의 전사, 제자가 되겠습니다.》

조선혁명의 위대한 지도자를 찾아 떠났던 길림에로의 초행길을 걸으며 마음속에 소중히 품었던 생각을 터놓는 김책동지의 말은 더없이 진실하고 절절하였다.

《소원이 정 그렇다면 좋습니다. 우리 혁명의 길에서 뜻을 같이하고 생사를 같이하는 혁명동지가 되여 조국의 광복과 인민의 자유, 행복을 위하여 힘껏 싸웁시다. 김책동무!》

《장군님!》

김책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두손을 꽉 부여잡고 어깨를 떨었다.

혁명동지!

정녕 이보다 더 귀중하고 뜨거운 부름, 고귀한 호칭이 또 어데 있으랴.

-죽어서도 위대한 태양의 품을 떠나지 않으리라.

이것은 위대한 수령님을 받드는 길에 혁명의 영원한 승리가 있다는것을 심장으로 체득한 김책동지의 억년 드놀지 않는 신념의 맹세, 심장의 맹세였다.

수령결사옹위의 별

김책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온 영광의 그날로부터 수령님께 가장 충직한 태양의 별,수령결사옹위의 별로 한생을 빛내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김책동지의 충실성에 대하여 감회깊이 추억하시며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다음과 같이 쓰시였다.

《길림시절에 새 세대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이 나를 령도의 중심으로 내세웠다면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에는 김책을 비롯한 항일혁명투사들이 나를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내세우고 조선혁명의 주체로선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나를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내세우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 나라 혁명에서는 령도중심이 형성되였습니다. 이 령도중심을 꾸리는데서 김책은 특출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을 조국의 운명, 혁명의 운명으로 충직하게 받들어온 김책동지의 한생은 조선의 혁명가들이 자기 수령을 어떻게 받들어모셔야 하는가를 실천적모범으로 보여준 일편단심의 삶이였다.

오늘도 우리 인민은 김책동지가 해방직후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당창건준비를 위한 과업을 받고 함흥에서 첫 파견원의 임무를 수행하던 나날을 잊지 않고있다.

20성상 항일의 불바다를 헤치시며 빼앗겼던 조국을 찾아주신 민족의 위대한 태양을 우러러 목청껏 만세를 부르는 함흥시인민들은 끝없는 환희에 넘쳐있었다. 그러나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부 종파분자들과 사대주의자들은 거리들마다에 우리 인민의 절절한 념원과 지향에 맞지 않는 구호들을 내다붙이였다.

함흥시에 도착하자마자 이것을 보게 된 그는 격분을 금할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해당 일군을 부른 김책동지는 그를 호되게 꾸짖었다.

《동무는 지금 거리들에서 인민들이 김장군님 만세를 목청껏 부르는것을 보지 않는가? 왜 인민들의 열화같은 흠모의 정을 반영한 <김장군님 만세!>를 써붙이지 못하는가.》

준절하게 울린 그의 목소리는 수령을 받드는 전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며 오늘도 우리의 귀전을 감돌고있다.

김책동지는 해방된 조국에서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받은 영예로운 임무를 기어이 수행할 불타는 한마음을 안고 로동자, 농민들속에 깊이 들어가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의 위대한 령도자이신김일성장군님의 두리에 철석같이 뭉치자는 혁명적구호를 높이 들었다.

반동들의 악랄한 책동으로 하여 시시각각 생명의 위협을 받고있던 그때 자신보다 먼저 건당, 건군, 건국의 어려운 력사적과제를 수행해나가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안녕을 바라며 당시 함흥시보안서에서 일하던 한 일군을 평양으로 떠나보내면서 한 김책동지의 말을 다시금 새겨보자.

《우리 장군님을 옹호보위하면 조선혁명이 살고 장군님을 받들지 못하면 인민이 죽고 조선이 죽게 되오. 때문에 우리 조선의 혁명가들은 살아도 장군님을 받들어모시고 죽어도 장군님을 결사보위하다가 장군님의 품에서 영생하는 전사가 되여야 하오. 동무는 내가 낯선 고장인 함흥에 와서 고생한다고 말하는데 우리 장군님께서는 지금 나보다 더 어려운 속에서 지내고계시오. 그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쓰리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평양시의 사회질서가 매우 혼란되여있다고 하오. 때문에 지금형편에서 우리가 장군님을 받들어모시는데서 가장 급선무는 장군님께서 계시는 평양시의 혼란된 사회질서를 바로잡는것이요. 평양시가 안전하여야 장군님의 안녕이 보장될수 있소.》

중대하고도 영예로운 임무를 받고 기쁨에 넘쳐있던 그 일군이 한순간 파견원의 신변을 생각하며 머뭇거리자 김책동지는 그를 엄하게 질책하였다.

《…동무가 과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수 있소. 이 김책이가 도대체 뭐길래 우리 장군님을 받드는 일에 감히 견준단 말이요. …》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말없이 한동안 분을 삭이던 김책동지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동무는 내가 무슨 특별한 존재처럼 생각하는데 이 김책은 장군님의 전사요. 장군님께는 전사들이 많소. 그러나 그 전사들의 힘과 지혜를 다 합쳐도 장군님을 대신하지 못하오. 그것은 저 하늘의 별들을 다 합쳐도 태양을 대신하지 못하는것과 같소. 태양은 태양이고 별은 별이요.

장군님의 전사!

세상에 이보다 더 영광스럽고 긍지높은 칭호가 또 어데 있겠소. 그래서 나의 인생길은 그리도 밝고 보람찬것이요.》

이 신념의 웨침은 수령결사옹위야말로 혁명의 천하지대본이며 조선의 혁명가들의 생명임을 뼈에 새긴 김책동지의 심장의 토로였다.

늘 심한 병으로 신고하는 불편한 몸이였지만 수령님께서 전화로 찾으실 때면 병석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서야 정중히 전화를 받았고 머나먼 현지지도의 길에 계시는 수령님의 신변안전과 건강에 대하여 일일이 알아보고서야 마음을 놓군 하던 이야기들은 얼마나 사람들의 심금을 뜨겁게 울려주는가.

그렇다.

수령결사옹위, 그것은 김책동지의 한생의 전부였다.

하기에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긴 그날로부터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김책동지의 심장은 이렇게 고동쳤다.

우리 혁명의 태양, 우리 조국의 태양, 우리 인민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을 지키는 길만이 우리 당이 강하고 우리 조국이 번영하며 우리 인민이 잘사는 길이라고.

신념으로 헤쳐간 건국의 초행길

신념의 뿌리에서 솟아난 충실성만이 절대적인 충실성으로 될수 있다.

해방후 김책동지가 나라의 경제사업을 책임지고 일한 기간은 불과 3년 4개월, 모든것이 여지없이 파괴된 나라의 경제실태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생소한 그에게 있어서 건국사업은 간고한 초행길이였고 신념을 지키는 길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신임에 의하여 나라의 부수상 겸 첫 산업상의 중책을 지닌 김책동지의 가슴속에는 나라의 산업건설도 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시는대로 하면 문제없다는 투철한 신념이 성벽처럼 자리잡고있었다.

잊지 못할 건국의 나날들을 추억깊이 더듬어보느라면 주체62(1973)년 3월 남포시당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의 구절구절이 떠오른다.

《해방직후 우리가 새 조선건설을 위하여 투쟁할 때 우리 나라에는 유리공장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자체의 힘으로 유리공장을 하나 건설할것을 결심하고 남포시에 김책동무를 파견하였습니다.》

때는 공화국창건을 앞둔 그해 여름이였다.

남포유리공장건설과 유리생산문제를 두고 마음쓰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느날 김책동지를 부르시여 유리공장도 빨리 건설하고 자체로 판유리도 생산할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다.

언제 어떤 어려운 과업을 맡겨주어도 《알겠습니다.》라는 말밖에 모르는 김책동지는 즉시 남포에 내려갔다.

그는 나라의 산업전반을 맡아보는 분망한 속에서도 공장건설과 판유리인상기를 만들기 위한 투쟁과 함께 기술자, 기능공들을 양성하기 위한 사업을 힘있게 밀고나갔다.

때로는 새벽녘에 건설장을 떠나 평양으로 올라와 산업부문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처리하고 해당 부문 일군들에게 의견을 주기도 하였고 때로는 낮에 평양에서 새롭게 제시된 당의 방침을 관철하기 위한 중요한 회의를 하고 밤길로 유리공장건설장으로 떠나기를 그 몇번,

마침내 다음해 11월 용해로에 불을 지피였다.

그런데 판유리인상기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뒤에서 첫 실패를 놓고 동요하는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책동지는 그들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하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판유리를 우리자체의 힘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시였소. 동무들은 다른 나라를 건너다보면서 우리자체로는 판유리를 만들수 없는것처럼 말하고있는데 장군님께서 판유리를 우리자체의 힘으로 만들라고 말씀하신 이상에는 절대로 딴 생각을 해서는 안되오. 우리가 지금은 경험이 없고 기술을 잘 모르다나니 판유리인상기로 유리가 올라오지 않는데 앞으로 백번, 천번을 계속 시험해서라도 꼭 장군님의 뜻대로 우리자체로 판유리를 만들어야 하오.》

김책동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신 과업을 무조건 끝까지 수행해야 한다는 하나의 생각으로 심장을 불태우며 로동자, 기술자들의 혁명적열의를 적극 불러일으켜 2년동안에 자체의 힘으로 판유리를 생산하는 기적을 창조하였다.

언제인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김책동지에 대하여 회고하시면서 김책동지는 수령님께 끝없이 충직한 진짜배기충신이였다고, 사실 김책동지는 경제와 기술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였지만 수령님께서 산업을 맡아보라면 산업을 맡아보고 병기생산을 맡아보라면 병기생산을 맡아보았으며 수령님께서 걱정하시는 문제에 대하여서는 무슨 일이나 맡아해내군 하였다고, 일군들은 그렇게 당에서 무슨 일을 맡겨주면 한몫 맡아서 책임적으로 하여야 한다고 참으로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의도하시고 바라시는 일은 스스로 맡아 책임적으로 해내야 한다, 이것이 건국의 나날 김책동지의 가슴속에 확고히 자리잡은 신조였다.

해방후 철도가 혼잡하고 기차들이 제대로 다니지 못할 때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특수강문제를 놓고 심려하실 때에도 김책동지는 그처럼 어려운 과업을 맡아나섰고 그 관철을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신 과업이라면 몸이 열쪼각, 백쪼각 나더라도 무조건 해내고야마는 불굴의 정신력으로 성진제강소(당시)로 달려가 원철로를 폭파하고 생산정상화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신 과업을 훌륭히 수행하였고 료양소를 떠나 황철로 달려가 로동자들의 열의를 적극 불러일으켜 강철증산으로 당을 받든 김책동지의 투쟁기풍은 우리 일군들이 본받아야 할 숭고한 모범이다.

앞뒤가 없는 유리처럼 수령을 받드는 길에서 언제나 마음도 앞뒤가 없어야 한다는것이 김책동지의 참된 인생관이였다.

하기에 그는 일군들에게 늘 이렇게 말하군 하였다.

-우리 일군들은 누구나 장군님께서 주신 과업과 지시라면 언제나 어떠한 난관과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기어코 수행하고야말겠다는 립장에 서는 습관을 붙여야 합니다. 특히 장군님께서 근심하시고 념려하시는 과업에는 자기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쳐 투신하고 자기의 생명도 아끼지 말아야 하며 또 그렇게 해서 꼭 완수하고야마는데 습관되여야 합니다. …

김책동지는 이렇게 살며 투쟁하였다.

공업의 토대도 없고 자재와 자금, 민족기술간부도 부족했던 당시의 어려운 조건에서도 위대한수령님의 새 조국건설구상과 자립적민족경제건설로선을 지침으로 하여 산업건설을 대담하게 밀고나가 나라의 산업을 부흥시키고 민족경제의 자립적토대를 쌓는 사업에 크게 기여할수 있은것은 그가 지닌 수령관, 혁명관이 투철하였기때문이다.

온 심장으로 위대한 수령님을 받들줄 아는 일군이 되라!

이것이 옥과 같이 깨끗하고 대처럼 바르게 굳어진 김책동지의 인생철학이기도 하였다.

강성대국건설을 위한 오늘의 혁명적대진군은 김책동지와 같은 불굴의 혁명가들을 절실히 요구하고있다.

당이 바라는 진짜배기충신이란 하루일과를 장군님께서 주신 과업을 적은 사업수첩을 펼쳐놓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잘 집행하겠는가 하는 연구로부터 시작한 김책동지처럼 살며 일해나가는 그런 사람이다.

수령의 사상과 령도에 끝없이 충실하였던 김책동지처럼 모든 일군들이 경애하는 장군님의 높은 뜻을 받들어나아갈 때 오늘의 인민생활향상대진군은 더욱 힘있게 다그쳐질것이며 백두에서 개척된 주체혁명위업은 반드시 승리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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