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김 주한미대사 내정자 아버지,김대중대통령 납치사건관련자 확인


 

김대중 선생이 1973년 8월7일 납치된 이후 풀려나 자택에서 기자회견 하는 모습

 

‘김대중 납치 총책’ 아들이 주한 미국대사?

납치사건 직후 극적으로 생환해 눈물로 사건 당시를 설명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주한미대사로 내정된 성김

 

차기 주한 미국대사에 성 김 6자회담 특사가 내정됐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부친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 1980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언론은 1882년 한-미 수교 이후 129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계 주한 미국대사가 탄생했다며 반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가족사를 보면, 역사의 기이하고도 서글픈 인연을 느끼게 됩니다. 그의 부친은 국정원 전신인 중앙정보부 정보요원이었습니다. 전 주일공사 김재권 씨(본명 김기환)입니다. 그가 우리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건 불명예스럽게도 박정희 정권의 김대중 납치사건입니다. 중앙정보부 출신으로 당시 주일공사 직에 있던 그는 납치사건의 일본 내 총지휘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7년 미국 하원 소위원회에서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밝힌 김대중 납치 실행범 명단을 보면 △최고책임자 이후락(중앙정보부장) △한국 내 지휘 감독 김치열(중정 차장), 이철희(중정 차장보) △일본 내 총지휘 김재권(주일공사) △실행그룹 윤진원(공작 1단장), 윤영로(주일 대사관 참사관), 김동운(1등 서기관), 유춘국(2등 서기관), 홍성채(1등 서기관), 백철현(1등 서기관), 유영복(요코하마 총영사관 부영사) 등이 등장합니다.

1993년 9월 한국의 민주당 진상조사위와 일본 측 진상조사위 조사에서도 납치사건 관련자 12명 명단에, 김재권 당시 주일공사는 ‘총책지령’으로 등장합니다.

그의 행적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회고를 통해 비교적 상세히 남아 있습니다. 워커힐 총지배인으로 있던 김재권 씨를 중앙정보부로 데리고 간 사람이 김형욱 정보부장이고, 납치사건의 전모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회고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김재권씨

 

김형욱 씨는 김재권 씨에 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나는 김재권에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다. 박정희에게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보내지 않으면 납치사건을 공개하겠다’고 편지를 보내라. 김재권이 편지를 보냈고, 돈을 받은 후 김재권은 나를 찾지 않았다. 그는 주인을 할퀴고 가는 고양이 같은 위인이다.”

김형욱 씨는 왜 김재권 씨에 대해 이처럼 혹평을 했을까요.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미 CIA의 한국과 일본 책임자는, 훗날 주한 미국 대사를 지낸 그래그입니다. 그리고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을 때 미 CIA와 그래그는 납치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납치사실을 알게 된 건 김재권 씨의 배신 때문이란 게 김형욱 씨 판단입니다.

즉 김대중 납치 살해계획이 실패하자 김재권 씨는 곧바로 그래그에게 공작 전모를 실토하고선 제 살 길을 찾았다는 것이죠. 말하자면 납치공작 총책을 맡았던 사람이, 공작이 실패하자 조직을 배신하고 미국에 기대어 탈출구를 마련했다는 겁니다.

결국, 김형욱 씨 회고에 따르면, 김재권 씨는 납치사건 총책도 했다가, 작전이 실패하자 조직을 배신하고 미국에 밀고도 했다가, 나중엔 그 공작을 갖고 한국과 거래해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대가까지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니, 혹평을 들을 만도 합니다.

김대중 납치사건 일본총책이자 성 김 대사 부친인 김재권 씨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사건은, 박정희 군사독재가 반대파 야당 지도자를 제거하기 위해 국가기관을 앞세워 저지른 극악무도한 정치테러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사건 중 하나입니다. 이런 사실은 2007년, 중앙정보부 후신인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상규명을 통해서도 확인됐습니다. 다만, 납치의 최종 목표가 살해 계획이었는지에 대해선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면 이 사건의 종착지는 ‘김대중 암살’ 혹은 ‘김대중 실종사건’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연구자들 견해입니다.

새삼 이 사건을 돌아보는 이유는, 새로 부임하는 주한 미국대사의 가족사를 들춰내 당사자에게 흠집을 내려는 게 아닙니다. 그저 역사의 기이한 인연이 놀랍고 한국의 처지가 왠지 초라해 보여, 이면사를 소개할 따름입니다. 그의 부친이 사건의 모든 진실을 역사 앞에 고해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어쨌든 작고(1994년 6월)한 상황에서 굳이 부자를 연관 지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감정적으로야 ‘미국이 한국을 뭐로 보고 그런 인사를 보내느냐’고 불편해하며 우리 정부에 아그레망 거부라도 촉구할 수 있겠지요. 만일 과거 미국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던 사람의 아들이 한국으로 귀화했다가 주미 한국대사로 부임한다면 아그레망은커녕 미국 입국이나 가능했겠느냐며 불쾌해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현재 미국 국적의 미국인인 그에게 한국 국적이었던 부친의 과거에 대해 책임을 물을 권리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더구나 박근혜 의원이,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숱한 살인과 인권 유린에도 불구하고 현재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한국 상황에선 더더욱 그렇습니다. 과거사를 놓고 어떤 자격, 무슨 낯으로, 누구를 비난할 수 있을까요.

그의 부친의 과거 행적에 대해 씁쓸한 것은 한국민들의 감정일 뿐이고, 미국과 그가 문제의 납치사건에 대해 얽매일 이유도 없겠지요.

다만, 우리 언론이나 국민들이 성 김 대사의 부임을 보는 시각이 줏대 있고 지혜롭기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최초 한국계 대사” 따위의 막연한 혈연적-감성적 보도는 순진한 접근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의 부친이 누구든 무슨 일을 했든, 그는 이제 미국인입니다. 철저히 미합중국 연방정부 훈령에 따라 오로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일하러 올 뿐입니다. 한국과 미국의 이익이 대립될 때 무조건 미국 이익을 위해 일 할 미국 외교관일 뿐입니다.

외교적 친근감까지는 모르겠으되, 단순히 한국계 출신이라고 반기고 좋아하는 것은 줏대 없는 아전인수나 짝사랑에 불과합니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과 그늘이 잔뜩 몰린 한 지점에 그는 서 있습니다. 말하기도 그렇고 그냥 넘어가려니 찜찜한 문턱에 그가 서 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최초 한국계 대사” 운운의 소갈머리없는 보도나 태도는, 우리 처지를 초라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양정철닷컴 / 양정철 / 2011-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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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5일자 노컷 뉴스 보도 자료

[노컷뉴스 제공] 주한 미국대사로 내정된 성 김(51·한국이름 김성용) 대북 특사가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의 관심을 끌어온 가수 임재범(48)의 고종사촌형인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모으고 있다.

김 대사 내정자의 아버지는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3년 김대중씨(당시 야당 유력 정치인이자 15대 대한민국 대통령) 납치사건이 벌어졌을 때 주일(駐日)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다 이 사건 여파로 공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김 내정자 가족들은 1970년대 중반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이민을 갔다.

김 대사 내정자의 어머니는 임현자씨로, 임택근(79) 전 MBC 전무와 남매지간이며 임택근씨는 가수 임재범의 아버지이다. 즉 김 대사 내정자와 가수 임재범은 사촌 사이로, 김 대사 내정자가 임재범의 고종사촌형이고 임재범이 김 내정자의 외사촌동생인 것이다.

1960년생으로 서울 출신인 김 내정자는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서울에서 살았으며 이후 펜실베이니아대를 졸업, 로욜라 로스쿨을 거쳐 검사 생활을 하다가 외교관이 됐다.

김 내정자는 지난 2003년 주한 미대사관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하면서 북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으며 북한을 10차례 이상 방문했다. 2006년 미 국무부 한국과장으로 발탁돼 전시 전작권 전환, 북한 핵문제, 한국 대통령 선거 등과 관련된 업무를 처리했다.

김 내정자는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시절 고속 승진을 하며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오바마 행정부 고위 관계자들로부터도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2011/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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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3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자행되었던 자신에 대한 동경납치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강력히 촉구하고 나서는 등 ‘동경납치사건’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에 장신기 씨가 지난 2004년 8월 5일자 기고문 “‘김대중 살해미수 납치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올립니다-편집자 주. 며칠 뒤 8월 8일은 이른바 지난 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한 지 31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사건은 박정희 유신 체제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한일관계 그리고 한미일 관계의 특성을 알게 해주고 이 사건 이후로 유신 체제에 대한 반대가 국내외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한 여러 가지 증언과 취재 등의 결과로 사건의 본질이 ‘김대중 살해 미수 납치’에 있다는 사실이 상세하게 밝혀진 상태임에도 아직도 이 사건에 대한 개념규정은 ‘김대중 납치’로 되어 있는데 이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사건 발생 31주년을 앞두고 이 사건에 대해서 ‘김대중 납치 사건’이라는 개념 규정 대신에 ‘김대중 살해 미수 납치’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함과 동시에 그 근거를 상세하게 제시하려고 한다.

역사적인 사건의 성격을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1차적으로 해당 사건에 대한 엄격한 개념 규정이 필수적이다. 개념규정이 모호하거나 본질과 어긋나게 될 경우는 역사적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는 데에 혼란을 제공하게 되며 더군다나 사건의 개념을 규정하는 데에 있어서 권력의 논리가 개입되게 될 경우 역사적 진실이 흐려지게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점이 발생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부정한 독재 권력자에 의해서 발행한 어두운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한국 현대사의 현실을 볼 때 위와 같은 문제점은 한국 사회가 해결해야만 하는 시급한 당면 과제이기도 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73년 8월 8일 일본 동경에서 발생한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 역시 역사적 개념규정을 제대로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사건 발생 후 이 사건에 대해서 유신 정부는 ‘김대중 사건’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고 이것을 고수하였는데 이 개념에는 정부 책임론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유신 권력은 이 사건에 정부의 조직적인 개입이 없었으며, 김동운 1등 서기관의 개인적 범행으로 몰고 갔다.

김대중 사건이라는 규정이 유신 정권의 입장을 반영한다면 김대중 납치사건이라는 규정은 김대중에 대한 암살의혹이 강하게 제기되지만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기 힘들었던 사건 발생 이후의 엄혹한 국내 정세 상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진상 규명이 이뤄지기 시작하면서 사건이 진실이 살해 미수후 납치였음이 명백하게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현재 통용되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라는 용어는 진실의 절반만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한계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이 사건의 명칭을 김대중 살해 미수 납치 사건이라고 정확하게 개념규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유신 권력이 김대중을 살해하려고 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것은 다음의 여러 가지 경우를 통해서 증명될 수 있다.

사건 최종 책임자들은 책임을 회피하거나 국가 기구의 조직적 개입 자체를 부인하는 등 거짓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통해서 진실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미국 관련자들은 박정희 정권이 김대중을 살해하려는 것으로 파악하여서 박정희 정권에 압력을 넣어서 김대중을 극적으로 살려주었다는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박정권의 의도를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피해 당사자인 김대중의 증언을 볼 때 범인들이 살해할 의사를 가지고 구체적 행동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처럼 사건이 진행되었던 긴박한 순간에 대한 증언뿐만 아니라 박정희 유신 정권의 성격과 김대중의 반유신 투재 운동의 성격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구조적인 접근을 통해서도 이 사건의 핵심은 납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김대중 암살 후 사건 은폐’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 당시 김대중은 일본에 있었는데, 일본에는 김영삼, 양일동, 송원영 의원 등 당시 야당 인사들이 있었다. 다른 의원들은 유신 선포 후 귀국을 하였는데 김대중은 귀국을 하지 않고 해외에서 반유신 투쟁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당시 국내는 유신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김대중은 71년 대선에서 대중민주체제와 남북 화해 협력 노선을 내세우면서 박정희 근대화노선의 핵심인 반공에 기초한 개발독재론을 정면에서 비판하였는데 김대중의 노선은 민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냄으로 해서 박정희 대통령을 긴장시켰다.

김대중은 71년 선거에 대해서 ‘그 동안 지배 계급 내에서의 여야 투쟁만을 목격했던 민중들이 진정 자신들을 위한 정치지도자가 출현했다는 점에서 열광했으며, 민중들의 마음 속에 깊게 자리 잡혀 있는 평화통일에 대한 열정을 한 곳으로 모아서 이끌어 갈 수 있는 정치지도자가 나왔다는 사실에 열광했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로 인하여 박정희는 김대중에 대한 일종의 공포심과 콤플렉스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극우냉전세력들의 김대중에 대한 공포심과 콤플렉스는 김대중의 진취적인 진보노선과 민중들의 열망을 수렴함과 동시에 정치적 열망을 일깨우면서 민중역량을 극대화시키는 김대중의 정치 지도력에 기인한 것이다.

획일적인 명령과 복종 그리고 지배와 순응이라는 전근대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던 박정희와 전두환을 비롯한 정치군인들은 김대중의 정치노선과 민중적 리더십에 대해서 공포심과 콤플렉스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미 71년 총선 직전에 트럭을 동원해서 김대중을 암살하려고 했을 정도로 박정희 권력은 유신 이전부터 김대중에 대한 정치테러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런 김대중이 72년 유신 선포 당시 일본에 있었고 귀국을 하지 않고 해외에서 반유신 투쟁 운동을 전개하게 되자 박정희 정권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박정권을 더욱 신경쓰이게 하는 것은 김대중의 활동성과였다.

당시 해외에서의 김대중의 반유신 투쟁 운동은 두 가지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는 재미 재일 교포들에게 한국의 민주화와 평화 통일을 방향성과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이들을 조직화하여서 반유신 투쟁 운동의 근거지를 확보한 후 한국에서의 반유신 투쟁 운동을 고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1973년 7월 6일 미국에서 한민통이 조직되었고 일본에서도 김대중 노선(대한민국 절대 지지, 선민주 후통일)으로 운동의 방향성이 결정된 8월 4일의 5인 회담 이후 8월 13일에 정식으로 조직하기로 하였다.(그런데 일본 한민통은 김대중이 8월 8일 납치 되어서 김대중이 없는 가운데 결성되었다.)

그리고 두 번 째로는 미국과 일본의 정계, 언론계, 학계 인사들과 광범위한 접촉을 하여서 이들 국가의 대한 정책의 기본 방향인 ‘선안보 후민주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한국의 민주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여서 양 국가의 대한 정책의 방향을 선회하도록 하는 데에 있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의 ‘선안보 후민주론’은 한국국민과 민족의 민주 역량을 과소평가하고 무시하는 일종의 강대국 우월주의적 사고의 발로로서 한국은 반공의 보루로서 존재하면 된다는 입장 하에 개발독재론을 옹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강대국의 대한정책이 한국의 민주화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김대중은 간파하고 있었고 특히 미국에 대한 비판은 용공적 태도로 여겨지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절망하고 있는 해외 교포들과 한국의 민주화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미국 일본의 지배 세력 모두에게 ‘한국의 민주주의 전통은 뿌리가 깊으며, 한국 민중은 민주주의를 위한 강한 열망과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한국민이 현재와 같은 어려운 처지에서 곤란을 겪는 이유는 이승만, 박정희 독재 권력에 의해서 정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함과 동시에 미국과 일본이 반공을 명분으로 해서 독재 정권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화가 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은 한국의 민주화 문제를 통일 문제와 관련시켜서 사고를 하고 있으며 한국의 분단과 그 이후에 독재 권력 유지에 있어서 미국과 일본의 책임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당시에 금기시되었던 분단과 통일 문제를 미국 책임론과 연계시켜서 사고하고 있었다. 김대중이 제기한 강대국 책임론은 근본적으로 한국 현대사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기초한 것으로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가 80년대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 김대중의 인식은 선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김대중이 해방 이후에 좌우 합작 노선에 의한 중도 민족주의 세력의 신국가 건설 노선에 동참하였던 것을 고려해 볼 때 김대중이 그 당시에 형성된 민족 이성을 굳건히 지키고 발전시켜왔다는 해석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김대중의 활동은 한국의 민주화 문제를 국제적 차원의 문제로 확장시킴과 동시에 역사적으로 볼 때도 해방과 분단 형성과 연관시켜서 사고함으로 해서 일종의 전시파시즘 체제를 구축하려는 박정희 유신 정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활동이 지속될 경우 유신 정권의 존립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국내에서는 어떠한 형태의 반유신 운동도 제기되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김대중이 해외에서 대단히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은 박정희로서는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면 박정희 정권의 본래의 목적이 단순한 납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해 후 사체를 유기하여 사건을 은폐하는 데 있다는 추론을 할 수 있다.

이미 김대중은 광범위한 국내외적인 역량을 축적한 상황이므로 박정권으로서도 김대중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위해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큰 것이었다. (8월 8일 납치 당시 범인들이 김경인 전 의원한테 한 말인 ‘소란을 피면 한국의 수치가 된다’에서 알 수 있듯이 사건 자체가 외부에 알려지면 큰 파장이 올 것이라는 것을 범인들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박정권은 김대중에 대한 위해를 은밀한 방법으로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박정권의 행위가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위해 대상인 김대중을 살해해야만 하는 것이고 사체도 유기하여서 사건을 은폐하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건 뒤의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해외에서 김대중을 납치한 행위 자체만으로도 이미 이는 엄청난 국내외적인 파장을 가져와서 박정권에게 큰 정치적 타격을 주었던 것을 본다면 외부에 공개할 것을 전제한 ‘단순한 납치’는 박정권의 본래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러므로 박정권은 본래 김대중을 암살하고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지만 호텔에서의 암살계획은 김경인의원의 등장으로 실패하였고 두 번 째 바다에서 수장시키려던 계획은 미국의 압력에 의해서 좌절되었기 때문에 처음에 의도와는 다른 납치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위와 같은 박정권이 처한 구조적 환경에 따른 행위의 성격을 분석하는 방법을 통해서 박정권의 의도를 분석해낼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다른 사건들과의 비교를 통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박정권은 정적과 자신의 비판세력에 대한 살인을 한 적이 있다는 점에서 ‘살인’을 정권의 통치 수단의 하나로서 활용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김대중에 대한 살해 의도는 박정권의 본질상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점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납치가 목적이었다면 8월 8일에서 8월 13일까지 시간을 끈다는 것 역시 말이 안된다.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는 본래 목적인 암살이 실패하고 이 문제에 관련된 미국과 일본 정부와의 3각 협의가 진행되면서 사건 처리에 대한 대략적인 틀을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박정희 정권이 암살 계획을 주도하고 일본의 우익 정치 세력이 이에 적극 협력하였다고 할 수 있으므로 암살을 공모한 한국과 일본의 정치 세력 사이에 집중적인 사후 대책이 논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여러 가지 직접적인 증거들과 정권의 의도성에 대한 면밀한 분석 그리고 사건 진행 과정과 박정희정권의 성격들을 고려할 때 이 사건은 ‘김대중 살해 미수 납치 사건’이라고 개념규정하는 것이 역사적인 타당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김대중 납치사건은 진실의 절반만을 담고 있는 개념으로서 이는 사건의 본질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을 당시에 형성된 불완전한 개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건 발생 31주년이 되는 올해부터 이 사건에 대해서 ‘김대중 납치’사건이라는 개념 대신에 ‘김대중 살해 미수 납치 사건’이라는 개념 규정을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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